[열린 광장] 올드타이머
부엉이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매년 추수감사절을 지나 수은주가 내려가고 새벽 안개가 짙게 낀 날에는 어김없이 부엉이가 와서 운다. 자연의 법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아마 무더운 여름철에는 깊은 산중에 있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먹이를 찾아 인가가 있는 동네로 내려오는 것 같다. 매년 우리 집 지붕에 찾아와서 계절을 알리니 이보다 귀한 손님이 없다.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니 올해도 다 지나간 느낌이다. 아직 12월 한 달이 남지 않았냐고 반문하겠지만 한 해의 막달인 12월은 산허리의 능선을 지나는 안개와 같다. 바람결에 지나가는 여인의 신비한 옷자락처럼 여운만 남기며 사라진다. 마지막 달의 하루하루는 한 움큼의 모래알처럼 손안에 가득한 것 같지만 어느덧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다. 한 해를 마감하며 할 일이 많을 것 같고 마음만 스산한 12월, 마치 꿈많던 젊은 날의 놓쳐버린 연인의 환상마냥, 아쉬움과 회한으로 올 한해도 이렇게 보낸다. 이런 미완성의 세월을 80번이나 넘겼다. 1984년부터 한국 정부에 해외교민청 설립을 꾸준히 요구했고, 지난해 마침내 재외동포청이 출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동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었다. 국민훈장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했다. 그런데 순간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인 사회의 토대를 마련했던 분들 가운데 최근 2~3년 새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유독 많았다는 사실이다. ‘기부왕’으로 잘 알려진 고 홍명기 회장님을 비롯해 체육계 원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분들이다. 지금도 친분이 있는 전 한인단체장 한 분이 병원 응급실에 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그들은 1960년대부터 LA 한인 타운을 만드는 데 구심적 역할을 한 귀한 분들이다. 젊은 층은 이들을 ‘꼰대’라고 깎아내릴지 몰라도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인 타운도 없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런 귀중한 동료, 선배들이 한 사람씩 유명을 달리할 때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리고 우리 이민 역사의 한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허무함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김형석 교수를 30여 년 전 여러 번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의 지경(地境)이 좁아지는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지경(地境)이 좁아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런 철 늦은 지혜가 생길 때쯤, 재외동포청에서 국민훈장을 준다는 통보가 온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국민훈장’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삶의 지경이 좁아진 올드타이머들을 모실 기회를 만들고 싶어 모임을 가졌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올드타이머 세대는 새 싹을 돋게 하는 봄과 같은 존재다. 차세대가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는 자랑스러운 세대이다. 이영송 /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열린 광장 올드타이머 올드타이머 세대 부엉이 울음소리 국민훈장 석류장